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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과학

근대화학과 진화론의 성립

by 똑똑한 블로그 2020. 9. 3.

근대적 과학으로서의 화학의 성립


근대적인 과학으로서의 화학의 성립은 역학이나 천문학보다 100년이나 지체되었다. 화학은 1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양적인 것으로 변화하는데 저항해온 셈이다. 사실 화학은 천문학이나 역학과 달리 대학에 몸담거나 왕실의 후원을 받는 학자들의 활동이 아니었다. 과학 혁명이 한창이던 17세기에도 화학은 신비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연금술과 연관을 맺고 있었고, 화학 관련 기술과도 잘 구분되지 않는 활동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중엽 이후로 화학은 기초과학이라고 불리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중에서 지루하고 별것 아닌 결과들을 잔뜩 내놓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이 되어버렸지만 당시에 화학적 활동은 과학활동에서 일종의 영적(spirtual)의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화학에서 영적인 것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볼 때, 무미건조한 대수와 기하학에 의존하는 역학이나 천문학은 세계를 죽은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학 활동 속에서 다른 차원의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역학이나 천문학에서 철저하게 관철되었던 양화에 저항했고 양화에 의해 위치와 차원 이외에 모든 속성을 박탈당한 물질에 본래의 속성을 회복시키려는 움직임에 가담했다.

그들은 자연을 대상화하고 그것을 관찰하여 냉혹하게 기술하는 그러고 나서 자연을 조작하고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즉 물질과 교감하는 공감적 화학으로 나아가려 했던 것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말에 근대 화학이 성립될 쯤에도 화학 연구자들은 여전히 좋은 공기나 나쁜 공기와 같이 인간의 공감이 개입된 말을 사용했다.

 

 

 

라부아지에의 등장


역학에서 포물선은 좋은 것이고 타원은 나쁜 것이라는 말을 한다면, 그는 역학 연구자 누구로부터도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러나 화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좋고 나쁨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가장 건조한 방식으로 연구를 하던 라부아지에의 경우조차도 마찬가지였다. 화학이 이렇듯 양화, 기계화에 저항했지만 결국 기계론적 우주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가는 운명을 거역하지는 못했다. 물리학의 세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로 철저하게 무장한 라부아지에가 등장하면서 결국 화학의 양화와 합리화도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전통적으로 화학의 핵심을 이루는 새로운 물질의 분리라든가 합성이라는 면에서는 이룩한 일이 별로 없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니다. 그는 영국의 기체 화학자들이 성취한 여러 새로운 기체들의 발견에 조금도 기여한 바가 없었고 독일 등지에서 조금씩 이루어지던 새로운 무기화합물이나 유기화합물의 합성에도 전혀 기여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연구자들이 분리한 기체가 산소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냈고 또한 많은 새로운 기체를 발견한 영국의 프리스틀리 같은 낭만적 계몽주의자와 달리 엄밀한 양적인 사고라는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에 의해 화학은 연금술이나 공업적 기술 등의 혼돈 속에서 벗어나 근대 학문으로 정돈된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여러 면에서 매우 근대적이었다. 그는 그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의 근대 화학의 성립에 기여한 프리스틀리와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그는 많은 시간을 연구에 쏟았고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물질적 안락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라부아지에는 법학을 공부했고 지질학을 거쳐 화학으로 들어왔다.

 

화학에서 분석이란 종국에는 물질의 근원을 찾는 일로 통한다. 당시에도 여전히 물질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100여 개의 원소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4 원소에서 얼마 더 나아가지 않은 것이었다.

 

라부아지에는 분석기법을 이용한 원소의 탐구로 화학의 근본 문제에 도전했는데 라부아지에의 최초의 본격적인 화학 실험은 물과 흙이라는 두 가지의 원소의 변환 가능성을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양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최대로 발휘해서 무게 측정을 통해 물을 오랫동안 끓여도 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임으로 물은 흙이 될 수 없는 근원 물질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의 무게 측정이라는 방법은 그 후에 그가 수행한 실험들에 어김없이 적용되었고 결국 그는 연소 이론을 낳음으로써 화학을 정돈하는 도구로 사용된다.